'이민 1세 변호사' 첫발 내딛는 조미래씨 76년 이민후 ESL교사•노총 등서 근무 40대중반 로스쿨 입학...작년말 司試 합격 "소외된 이들 돕는 법조인 될 것" 다짐
토론토시청 서편 유니버시티 애비뉴와 퀸 스트릿 동북코너에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이 위엄 있게 서있다. 이 건물이 바로 온타리오변호사협회(The Law Society of Upper Canada)가 자리잡고 있는 오스굿홀(Osgoode Hall)이다.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음악의 전당 로이탐슨홀에서는 지난달 마지막 금요일(22일) 온주변협이 새내기 변호사 300여명에게 자격증을 수여하고 협회원으로 영입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날 자격증을 받은 변호사들은 오스굿홀에서 소정의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한 1천여명중 일부. 수여식은 21일과 22일에 걸쳐 토론토•오타와•런던 등에서 분산 거행됐다. 이들중에는 중년의 한인여성 조미래(51)씨도 포함돼 있었다. 장성한 아들 3형제를 대동하고 행사에 참석한 그는 내내 가슴 뿌듯한 표정이었다. 자녀들에게 이민 1세가, 더구나 나이 50이 넘어서도 마음먹은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사가 진행되며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5년전 변호사가 되겠다며 토론토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오타와로 떠나던 날부터 지난 12월 꿈에도 그리던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기까지 겪었던 눈물겨운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돼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이 광경을 지켜보지 못하시는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민 1세라고 해서 디스카운트된(discounted) 꿈을 가지고 무덤에 가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잘못하다가는 여생을 아이들에게 기대다가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 단단히 먹고 로스쿨(법학대학원) 문을 두드렸죠.』 그는 자신의 도전이 실의에 빠진 교민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읊조린다 25세의 나이에 이민와 그로부터 꼭 그만큼의 세월을 훌륭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소양을 키우는데 사용(?)한후 마침내 보기 드문 「1세 변호사」가 된 그는 나머지 25년을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는 변호사로 살아가고 싶다고 세 아들에게 말한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97년 가을 오타와대학 로스쿨에 입학, 3년만인 2000년 5월에 졸업했다. 로스쿨에 들어가려면 일반대학을 3년 이상 수료해야 하지만 대다수 입학생들은 대학을 졸업(BA)한 사람들이다. 로스쿨 졸업후 토론토의 이현숙변호사 사무실에서 1년간 연수(articling)를 마치고 지난 6월부터 최근까지 종합법률회사인 레그 앤드 레그(Legge and Legge)에서 수습변호사(student-at-law)로 일해왔다.
온주에서 변호사가 되려면 3년 코스의 로스쿨을 졸업하고 1년간의 연수를 마친뒤 협회에서 제공하는 소정의 입회(bar admission) 코스를 거쳐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코스를 제대로 밟으면 대개의 경우는 시험에 합격한다. 그런 면에서 경쟁이 치열한 한국의 사법고시와는 사뭇 다르다. 캐나다의 사법시험은 자격시험일 뿐, 경쟁시험은 아니다. 이민온지 20년만에, 40대 중반의 나이로 법학을 새로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학기 5과목을 마쳐야 하는 공부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듣고 싶은 과목은 많은데 학교에서 그 이상 못듣게 해서 청강을 많이 했어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르던 젊은 시절과 달리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니 공부에 대한 열망이 절로 샘솟더군요.』
그는 직장에서 영어로 읽고 쓰며 법을 다루는 일에 종사한 덕에 공부자체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첫 시험을 보았을 때에 긴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캐나다에서서는 처음으로 보는 법학시험이어서 너무나 긴장했어요. 혹시 한국말로 답을 쓰지 않을까 무척 겁이 났어요. 물을 한통 가져가서 마시는데 꿀꺽하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났던지 부끄러워 혼이 났어요. 거기서 점수가 좋게 나오자 차츰 자신이 붙더군요. 이후론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구요.』 그러나 가족을 토론토에 두고 혼자 떠나 하는 공부였던 만큼 심적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어지간히 어려웠다. 게다가 3년간 공부에 매달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좋은 직장에 근무해 여자로서는 꽤 많은 급료를 받았지만 졸지에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하니 집안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모아둔 돈도 없어 등록금(연 6천달러) 마련도 쉽지 않았다. 그동안 월급 못받은 것까지 계산하면 변호사가 되기까지 들어간 돈이 25만달러는 될 것으로 그는 추산한다.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이민난민위원회(Immigration and Refugee Board)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틈틈이 일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했다. 학교에서 준 연 1천달러 정도의 장학금도 보탬이 됐다. 다행스럽게도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방학 때마다 일자리를 줘 크게 도움이 됐다. 어디 그뿐인가. 체력관리를 하라며 건강식품을 보내준 토론토교민도 있었다. 늦깎이 학생이지만 줄곧 학업성적은 좋았다. 전국의 법학도들이 벌이는 모의재판(moot) 경연대회에 원주민법 분야 오타와대학 대표(3명)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도 자랑스러운 추억중 하나다. 2학년 때 쓴 학기말 논문을 담당교수가 학술지에 발표하라고 추천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지 않았지만 로스쿨 입학시험인 엘셋(LSAT•Law School Admission Test) 성적 및 이화여대 영문과 성적증명서와 이력서만으로 로스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교측이 자신의 영어실력에 후한 점수를 준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그는 영어를 잘한다. 한국에서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민와서도 영어를 더 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로스쿨 입학전까지는 토론토노총(Toronto Labour Council)의 노동교육센터(Labour Education Centre)에서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교재 편찬과 50명에 가까운 ESL교사 훈련을 담당하면서 영어실력이 크게 향상됐다. TESL(Teaching English as Second Language) 자격증을 상급레벨까지 받고 ESL교사로 다년간 근무하던중 노동교육센터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는 TESL 자격증 외에도 중고등학교 교사자격증(Ontario Teaching Certificate)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반교사 자격증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보조교사(replacement teacher)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다 너무 피곤해 그만두고 ESL교사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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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로스쿨에 들어갈 마음을 먹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곳이 바로 토론토노총이다. ESL 교사 훈련과 교재편찬 일을 하다 승진돼 노조를 위해 소수민족•여성문제•인종차별문제 등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업무상 노동관계 법규를 익히면서 아예 공부를 좀더 체계적으로 해서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민자가 아니고, 여자가 아니고, 영어를 제2의 언어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뭐가 되고 싶으냐고 자문하니 변호사라는 답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되든 안되든 로스쿨에 들어가기로 작정했어요. 변호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생각했죠.』 노총 고위간부들에게 법규에 대해 브리핑도 하고 때로는 프로그램을 수백명 앞에서 설명하면서 대중연설 기술과 자신감을 기를 수 있었다. 『연설을 위해 어떤 때는 밤을 새워 내용을 외우기도 했거든요. 몇 번 하니까 자신이 생기더군요. 말이고 글이고 자기 생각이 뚜렷하면 조금 말이 매끄럽지 않더라도 청중들이 귀를 기울이더라구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것이 훌륭한 강연의 비결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랫동안의 기자생활은 그가 로스쿨을 무난히 졸업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 합동통신(현 연합뉴스 전신) 기자였던 그는 76년 이민온 다음주부터 한국일보의 전신인 캐너더뉴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캐너더뉴스가 주간지에서 주2회로, 주2회에서 다시 일간 한국일보로 바뀌는 것을 지켜본 장본인이기도 하다. 출산으로 인해 드문드문 휴직을 하기도 했지만 85년까지 한국일보에서 근무하면서 민완여기자로, 편집부장으로, 칼럼니스트로 필명을 떨치기도 했다. 84~85년 그가 집필한 「조미래 칼럼」은 여성독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는 주류사회와 한인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은 것도 유능한 변호사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인여성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한 그는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부회장 때에는 한인여성을 대표해 오타와 전국여성대회에, 회장시절에는 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신민당원이기도 한 그는 한인신민당후원회장과 연방신민당 소수민족협의회장 등을 맡으면서 정치에 눈을 뜨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정신대 문제에도 깊이 간여하고 있다. 캐나다정신대여성보상연맹(Canadia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Redress)를 조직, 공동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다. 필리핀•중국, 심지어 일본대표도 참가하는 이 단체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그가 로스쿨에 들어간 후 활동이 미진하다. 그는 여권신장에 앞장서온 공로를 인정받아 루베나 윌리스 여성문제센터(RWCCAW)가 주는 「뛰어난 여성상(Remarkable Women Award)」을 97년 받았다. 그의 수상소식은 토론토스타에 소개되기도 했다. 여성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인사회내 여성문제 해결에 앞장선 점과 인종차별 타파를 주제로 한 책들을 출간한 점, 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모임을 조직한 것 등을 인정받았다. 그는 문학에도 소질이 있다. 이화여대 문학회장과 교지기자를 지낸 그는 이민 초기에는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언론사에 근무하며 이화여대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주로 법정변호사로 활동하고 싶다는 그는 지난주 블루어와 베드포드(1 Bedford Rd.•세인트 조지 지하철역 부근)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했다. 『변호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객의 권익을 위해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의뢰인의 입장이 돼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률지식에서부터 삶의 지혜까지 총동원해야죠.』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그는 극빈자에게 법률비용을 국가에서 대주는 법률구조(救助)인 리걸 에이드(legal aid) 지정변호사 자격을 신청할 계획이다. 형법 및 난민신청•아파트 임대에 따른 분쟁은 리걸 에이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조변호사는 이민•난민•형법에서 가정법•상법까지 두루 다루지만 개인적으로 특히 관심이 많은 분야는 공법(public law), 특히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이민법과 형법이라고 말한다. 『법정(hearing)에 가서 변호를 잘하면 법을 바꿀 수도 있어요.
영연방국가들은 모두 판례법(case law)이기 때문에 변호사가 한 케이스를 잘 해결하면 법을 바꿀 수가 있는 셈이죠.』 변호사 자격증을 받은 후 아들 3형제의 손을 잡고 로이탐슨홀을 나서던 조변호사는 『캐나다 물정에 서툴고 영어가 모자라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함을 감수해야 하는 사례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학력
| 온타리오주 변호사 자격증 |
이화여대 영문과 학사 |
| 오타와 법대 법학사 |
이화여고 / 경남여중 |
| 이화여대 신문방송 석사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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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Legge & Legge 종합 법률회사 |
토론토 노동 교육센터 |
| 오타와 난민청 |
토론토시 교육청 소속 교사 |
| 이현숙 변호사 사무실 |
캐나다 한국일보 기자 |
| 합동통신 기자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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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 형법 변호사 협회 회원 |
난민 변호사 협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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